등장인물
먼로
의사
상담실. 파스텔 톤의 방. 정신과 상담실이라기보다는 가정집 서재 같은 분위기.
방 한쪽에 책상 하나, 의자 두 개가 놓여 있고,
책상 위에 꽃병 있다.
방 가운데 미니 탁자 위엔 위스키와 컵 있다.
문 옆에는 옷걸이 있다.
먼로, 조금 불안한 듯 왔다 갔다 한다.
액자를 보다가 액자 유리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보고 머리를 매만진다.
문이 열리고 의사 들어온다.
- 의사
- (양복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으며) 죄송해요. 오래 기다리셨나요? 최대한 빨리 끝낸다고 서둘렀는데...
- 먼로
-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. 제가 빨리 온 걸요. (의자에 앉으며) 사람들은 지각대장 마릴린이라고 하지만 전 서두를 줄 아는 여자랍니다. (꽃병 꽃 보며) 데이지 맞죠? 저번엔 백합이었는데, 꽃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요?
- 의사
- 어머니 작품이죠. 꽃을 가져다 놓으면 분위기가 살 거라면서 자꾸 바꿔 놓으세요. 처음엔 환자들 생각에 좋다고 했는데, 이젠 방 배치도 바꾸실 지경이에요.
- 먼로
- 엄마들은 캥거루 같아서 자식들이 떠나도 자식 생각으로 빈 주머니를 채우죠. 저희 엄마도 그래요. 담배 좀 줄여라. 단추 잠그는 게 어떠니. 오늘 아침에도 주스를 다 마시지 않았다고 싸울 뻔 했다니까요. (일어나 미니 탁자에서 술을 따르며) 셔츠 단추를 끝까지 잠그라고 한 건 너무하지 않아요? 난 가슴으로 먹고 사는데....
- 의사
- (보면)
- 먼로
- 왜요?
의사, 굳어 본다.
먼로, 웃음을 터뜨린다.
- 먼로
- 선생님한테는 장난도 못 치겠어요. 농담이에요. 어머니는 삼 년 전에 돌아가셨죠.
- 의사
- (안도) 천상 배우에요. 마릴린은.
- 먼로
- 그걸 리와 선생님만 알아줘서 유감이에요.
먼로, 술을 가져와 앉는다.
- 먼로
- 리는 그래요. 내가 잠을 못 자고, 감정 기복이 심한 게 배우로서 타고난 자질 때문이래요. 발끝에 있는 솜털 하나까지 안테나처럼 세우고 감정을 흡수 할 수 있는 예민함을 타고났다나? (옷매무새를 정리하며) 가슴 뿐 아니라 배우로써의 기질도 받았다는 건데 (의사 보며) 선생님 생각은 어때요?
- 의사
- (가슴 쳐다보다가) 네?
- 먼로
- 너무 야하지 않아요? 내일 오디션이 있거든요. 캐릭터를 위해 맞춘 옷이에요.
- 의사
- 먼로도 오디션을 봐요?
- 먼로
- 평생 입술 반 쯤 벌리고 엉덩이 흔드는 역할만 할 순 없으니까. 에이전트 모르게 보는 거예요. 어떤 작품인지 말 해 줄 수 없지만, 역할을 알려줄 순 있어요. 중학교 선생님. 선생이었던 여자가 사랑에 빠지고 버림받는 이야기에요.
- 의사
- 블랑쉬.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같은?
- 먼로
- 그보다는 순수해요. 블랑쉬는 미쳐버렸지만, 그 여잔 미치지 않아요. 마지막에 수녀가 되어 버리죠. 세상에 미련이 없다는 듯. 단호한 그 태도가 마음에 들어요.
- 의사
- 먼로는 잘 할 수 있을 거예요. 가끔 먼로와 이야기 할 때면 도화지 같은 느낌이 들거든요. 백지가 아니라, 아이 같은 순수함이요.
- 먼로
- 선생님은 친절하세요.
- 의사
- 진실을 이야기 할 뿐이죠.
- 먼로
- 거짓 없이?
- 의사
- 단 하나도, 거짓 없이. 요즘은 어떠세요?
- 먼로
- 이젠 내가 진실을 이야기 할 차례군요.
- 의사
- (웃음) 그게 우리가 여기 있는 이유죠.
- 먼로
- 선생님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. 헛것도 보이지 않고, 누군가 나를 따라다닌다는 강박도 없어졌죠. 어젠 스무 시간이나 잤는걸요? 선생님이 지어 준 약은 정말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.
- 의사
- 저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정신과 치료에서 중요한 건 서로간의 호흡이죠. 의사와 환자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으로써의 믿음. (먼로 손을 잡고) 어떤 의사들은 그걸 궁합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더군요.
먼로, 손을 떼고 일어난다.
책꽂이에 책을 본다.
- 먼로
- (책 훑어보며) 부부관계는 안할래요. 결혼 운은 없는 편이라서요.
- 의사
- 그럼 친구라고 하죠. 믿을 수 있는 친구.
- 먼로
- 그게 좋겠네요. (책 덮고, 의사 보며) 이 바닥에서 친구를 만드는 건 하늘의 별따기니까. 최고야 마릴린. 예뻐 마릴린. 심장이라도 내어 줄 것처럼 다가오지만, 난 알죠. 모두 내가 무너지는 걸 보고 싶어한다는 걸.
- 의사
- 당신을 질투해서 그래요. 당신의 재능. 아름다움.
- 먼로
- (의사 보며)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.
- 의사
- 최근에 이상한 건 없었나요? 잠을 오래 잔다고 했으니까, 꿈은 어때요?
- 먼로
- 친구가 된다더니 다시 의사로 돌아가는 건가요? 프로이드씨?
- 의사
- 친구 겸 의사라고 해 두죠.
- 먼로
- (잠시 생각) 며칠 전에 이상한 꿈을 꾸긴 했어요. 무대에 서 있는데, 관객들이 모두 나를 향해 화살을 당기는 거예요. 화살 끝에 눈동자를 달구요.
- 의사
- 그래서, 어떻게 했나요?
- 먼로
- 도망가지 어떻게 해요? (사이) 그런데 그 이후가 더 이상해요. 집에 돌아와 보니 배가 고프더라구요. 주방에 사과가 있길래 깎아 먹는데, 손을 베었거든요. 눈동자가 떨어지더라구요.
- 의사
- 눈동자요? 피 대신에?
- 먼로
- (웃음) 개 꿈 같은 거죠.
- 의사
- (잠시 생각) 예지몽이군요.
- 먼로
- 그 꿈이 뭘 알려주는데요?
- 의사
- 오스카. 트로피요. 아카데미가 될 수도 있고. 무대에 서는 꿈, 많은 눈동자들. 분명 상 받는 꿈일 거에요.
- 먼로
- (흥분)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거에요.
- 의사
- 그 동안 의사들은 마릴린에게 헛소리만 했죠.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, 자아분열, 혼란스러운 말들로 순수한 정신세계를 어지럽혔어요. 마릴린은 누구보다도 연기에 대한 인정 욕구가 강한 사람이에요. 그게 꿈으로 나타나는 거에요.
- 먼로
- 맞아요. 어제도 에이전트랑 그런 이야길 했어요. 왜 내게 똑같은 배역만 강요하지? 왜 작가주의 감독들이 날 불러주지 않냐구. 난 그들과 작품을 할 수 있어. 그럴 권리가 있다구. 에이전트는 대중들이 그런 이미지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더군요. 영화판에선 최근 흥행을 거들먹거리며 예쁘고 어린 배우들이 치고 올라온다고 떠들어 대고 있고, 신문에선 다음 결혼이 언제가 될지 내기나 하고 있죠. 사람들은 엄마가 되지 못해 안달 난 불쌍한 여자라고 떠들어대지만, 난 요리나 살림엔 재능이 없어요. 아이를 키우는 건 더구나요. 난 배우가 되고 싶을 뿐이에요.
먼로, 피곤한 듯 의자에 앉는다.
의사, 일어나 빈 잔에 위스키를 채워 가져다준다.
- 먼로
- (마시고) 웨이트리스로 일 했을 땐 일 달러를 벌면 햄버거를 사 먹어야 할지, 한 시간 연기 레슨을 받아야 할지 고민했었죠. 지금은 시간과 돈이 넘쳐나는데 둘 중 하나 선택할 권리도 내겐 없는 것 같아요.
- 의사
- 마릴린의 말 중에 동의 할 수 없는 게 하나 있군요.
- 먼로
- (보면)
- 의사
- 마릴린이 현역 배우들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거. 누구도 마릴린의 아름다움을 따라갈 순 없어요. 시를 쓰잖아요. 외면과 내면을 모두 갖춘 배우는 없어요.
- 먼로
- 부끄러워요. 보여드리는 게 아니었는데...
- 의사
- 마릴린의 감성은 놀라울 정도에요. 마릴린은 마릴린이에요. 자체로도 완벽하죠. 누구와도 비교하지 마세요.
- 먼로
- 선생님 이야길 들으면 힘이나요. 믿을 수 있는 친구 이상이에요. 선생님 덕분에 오디션에서 백퍼센트 컨디션을 보일 수 있을 것 같아요. (일어나) 가봐야겠어요. 대본을 보고 싶어졌어요. 완벽하게 연습 해야겠어요.
- 의사
- 약 처방을 더 해드릴게요. 마릴린이 푹 잘 수 있도록.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.
- 먼로
- 제 에이전트가 선생님의 반만이라도 따라갔으면 좋겠네요.
의사, 옷걸이로 가서 먼로에게 윗옷을 입혀준다.
먼로, 문을 연다. 문 밖은 눈이 부시게 환하다.
먼로, 나가려다가 멈칫, 뒤돌아 방을 둘러본다.
- 먼로
- 다음에 올 땐 드레스를 입고 올까 봐요. 방이 더 화사해지게... 박사님도 좋아하시겠죠. (의사 보며) 박사님이 행복하면 저도 기쁠 것 같아요.
- 의사
- 친절한 마릴린. 벌써부터 기대 되네요.
- 먼로
- 그럼 그 때 봬요.
- 의사
- 잘 가요. 마릴린.
먼로, 빛 속으로 사라진다.
※ 본 희곡은 ‘10분희곡릴레이’ 독자 투고를 통해 게재된 희곡입니다.
- 호들갑 작가소개
- 물리적 정신적 체력적 나이가 제각각. 숫자로 측정할 수 없음.
사람인 척 하는 게 힘들지만, 사람인 척 하는 게 특기.
가끔 내가 날 가지고 놀음. 그냥 쓴다. (필자 주)