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대화의 방법

김다은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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  • 대화의 방법

    김다은

    5469425@naver.com

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

    (까맣게 더러워진 발을 보여주며.)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야. 내 발바닥을 봐.


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

    아주 건강한 발바닥이구나.
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

    너는 늘 이런 식으로 현실을 회피하지.


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사라진다.

    다시 나타난 그의 손에는 볏짚이 있다.
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

    뭐하는 거야?


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는 대답이 없이 열심히 짚을 엮는다. 그는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를 외면하고 딴청을 피우는 것처럼 보인다. 볏짚을 꼬며 휘파람으로 가벼운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.
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
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, 늘 네 정신은 이 세상을 벗어나 다른 곳에 있는 것 같아.


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는 대답이 없다. 짚만 엮는다.
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

    내 말을 무시하는 거야? (주의를 끌려고 과장된 몸짓을 하며) 내가 안 보여? 내가 안 보여?


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

    침묵이 두렵니?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야.
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

    아니! 무책임함이 두려워. 나는 너에게 신발이 없어 더러워진 발바닥을 보여줬어. 근데 너는 하루 종일 먹을 음식과 돈을 구걸하고 다녔던 벌거벗은 내 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?


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다. 짚을 엮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다.
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

    (한탄하며) 내 발바닥이 불쌍해. 너는 최소한의 연민과 공감능력도 없어. 네가 행복하니깐 세상 전부도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?


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가 다 만들어진 짚신을 건넨다.
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

    내가 너에게까지 구걸한 것처럼 보였니?


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는 고개를 가로젓는다.
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

    단순히 샌들이 내게 생긴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. (자연스레 짚신을 신으려고 하는데 신발이 작은지 잘 안 들어간다.) 이건 더 깊고 복잡한 문제라고. 구조적이고 거시적인 문제야.


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는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가 하는 말에 고민을 잠시 하는 듯하다가,
   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인다.



    그러고는 개의치 않고 바닥에 드러눕는다. 휘파람을 분다.
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

    (잘 안 들어가는 신발을 억지로 끼워 신으며)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야. 너는 매일 휘파람만 불며 사는 게 덧없다고 생각하지 않니?
    (열정 있는 목소리로) 너는 행동해야해. 너와 나를 가난하게 만든 이 세계에 항의해야해.
    그게 나뭇잎 한 장의 힘에 불과할지라도. 나는 목이 말라. 그리고 배가 고파.


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는 낡은 가방에서 물과 도시락 통을 꺼낸다.
    그리고 물과 샌드위치 반쪽을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에게 준다.
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

    멍청아. 물과 밥을 달라는 말은 비유라고! 비유!


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

    비유가 뭐지? 너의 이름인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나 나의 이름인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 같은 것도 비유인가?
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

    너는 시를 좀 더 공부해야하겠다. (샌드위치를 꺼내 먹으며. 양배추 씹어 먹는 소리가 아삭아삭 들린다.)
    좀 더 비유와 함축적인 언어에 대해 고민해봐.


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가 가방에서 시집을 꺼낸다. 시집의 표지에는 ‘시’라는 글자만 제목으로 크게 써져 있다.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가 시집을 펼친다.
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

    이런 것도 시라고?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가 한 장 한 장 거칠게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울린다.
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

    (계속 책장을 넘기며) 너무 단순한 이야기를 하고 있군.

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는 시에 어울리는 명상 음악을 휘파람으로 분다. 느리고 정적이며 신비로운 음악이다.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는 책장을 마지막 장까지 다 넘겨보았을 때, 책을 신경질적으로 덮는다. 미간을 찌푸린다.
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

    (짜증내며) 휘파람 좀 멈춰. 나 지금 몹시 속상하니깐.


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

    (휘파람을 멈추고) 왜 속상한데?
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

    하루 종일 발이 아팠어. 너무 아팠다고. 너는 내 발이 하루 종일 얼마나 슬펐는지 모를 거야.


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야. 발바닥은 더 이상 울지 않아. 이젠 신발이 있잖아.
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

    너는 나를 이해 못해. 절로 꺼져 버려. 내 발이 혼자서 마음 편하게 울 수 있도록 넌 사라져줘.


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가 사라진다.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는 훌쩍인다. 들릴 듯 말 듯 한 아주 조금의 훌쩍임이다.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는 무대에서 사라졌지만 그의 휘파람소리는 들린다.
    혼자 우는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가 외롭지 않도록.
   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노래다.



    휘파람 한 곡을 다 분 후,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가 돌아온다.


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

    (손수건으로 분홍 열대어의 발을 닦아주며. 발바닥에게 말을 하듯) 다 울었니?
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가 고개를 끄덕인다. 늑대는 분홍 열대어의 발을 다 닦아준 후, 짚신을 다시 신겨준다.
    손수건에는 까만 때가 묻어난다.
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

    곧 밤이 올 거야. 우린 집도 없이 차가운 밤이슬을 맞으며 노숙을 해야 하겠지.


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

    그리 춥지 않을 거야.
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

    아니. 밤과 새벽은 늘 춥기 마련이야.


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

    저기 봐! 하늘에 네가 있어.
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

    노을 밖에 없잖아.


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

    분홍 열대어가 하늘을 헤엄치고 있어. 정말이야.


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

    어쨌든 곧 밤이 올 거야.



    달 그늘 아래 몸을 숨긴 늑대

    아직은 오지 않았으니깐 괜찮아.



   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하늘을 바라본다.
    창공을 가로지르는 분홍 열대어는 서툴게 휘파람을 시도한다. 바람이 부는 소리만 난다.
    늑대가 잇따라 옆에서 바람 부는 소리를 낸다.
    두 사람은 바람 소리를 서로 주고받길 반복한다.



    - 끝난다. -


작가소개

 

태그 대화의방법 김다은 10분희곡릴레이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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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0분희곡릴레이는 공모를 통해 작품을 접수합니다.상반기와 하반기, 연2회 작품 공모를 시행하며 자세한 일정은 추후 공지사항을 통해 안내 드립니다. 신진작가 여러분의 많은 참여와 관심 부탁드립니다.
제 50호   2014-08-21   덧글 12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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안수진
분위기와 인물들이 대화를 주고받는 방식이 좋네요:)

2014-08-07댓글쓰기 댓글삭제

베짱이짱
이름 설정과 인물들의 성격과 분위기가 잘 맞네요 ㅎㅎ

2014-08-07댓글쓰기 댓글삭제

한아름
베짱이의 바이올린은 명품이였군요.

2014-08-07댓글쓰기 댓글삭제

산토끼
이야기 분위기가동화적라 흥미로워요 인물들 이름을 굳이 이렇게 설정한데 이유가 있었을까 의구심 가지고 봤는데 마지막에 노을진 하늘을 가르키는 두 인물을 보니 이해도 되고 인상깊네요 어린아이같은 화자의 말투나 태도지만 그가 뱉는 대사는 현실적인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게 재밌고 놀랍네요 잘읽었어요

2014-08-08댓글쓰기 댓글삭제

오알
재밌당... 앞으로 쓰실 작품이 기대돼요

2014-08-09댓글쓰기 댓글삭제

김다은
안수진// 그래서 제목이 대화의 방법! 사실 좀 평범한 제목이긴 하지만 제목이 포인트였답니다. 언어적 대화가 아닌 행동과 움직임의 대화법을 앞으로 쓸 희곡에서도 다양하게 더 발전 시켜서 써 볼 생각이예요.

2014-08-09댓글쓰기 댓글삭제

김다은
베짱이짱// 인물들의 이름은 인디언식 이름이랍니다. ㅎㅎ 사실 두 인물의 이름은 밤과 해질녘이라는 이미지적 비유 말고도, 주제와 맞닿는 한가지 은유가 더 숨어져 있어요ㅎㅎ 뭘까용? 찾아 보는 재미~~!

2014-08-09댓글쓰기 댓글삭제

김다은
한아름// 베짱이의 가치를 알아차리는 귀가 바로 명품 귀죠!!! 감사합니다^^~.

2014-08-09댓글쓰기 댓글삭제

김다은
산토끼// 동화적 느낌이 드나요? 충격이지만 전 리얼리즘이라고 썼어요 ㅎㅎㅎ 무슨 글을 써도 전 이런 식으로 밖에 글이 안나와요 ㅠㅠ흑흑.. 재밌게 읽어주신 덕자분들 모두 감사합니다~!

2014-08-09댓글쓰기 댓글삭제

김다은
오알// 오알님! 재밌다는 칭찬을 들을 때 저는 제일 기분이 좋아요. 제 글이 취향에 맞으시다니 기쁩니다ㅎㅎ. 앞으로 작품 쓰는데에 더 재미를 붙이는 베짱이가 되도록 하겠습니다!

2014-08-09댓글쓰기 댓글삭제

끝...
시를 읽듯 ...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한줄 한줄 마음에 담게 되네요. ^^ ... 마지막... 끝난다... 에서 빵 ~~~

2014-08-18댓글쓰기 댓글삭제

김다은
끝.../ 시처럼 읽어주시다니 감사합니다~ 시 같은 희곡, 희곡 같은 시를 쓰고 싶습니다.^_^

2014-08-19댓글쓰기 댓글삭제